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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내가 죽는 꿈.

 

꿈을 뜨기 직전까지 나는 울고 있었다.

 

안타까움, 슬픔, 고통, 회한에 사로잡혀서.

 

너무나도 실감나는 감각이었기에 나는 그 모든 일들이 현실이라 믿어 의심치않았다.

 

나는 죽었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뜬다.

 

그 모든 슬픔과 안타까움과 고통과 회한을 전부 꿈으로 만들어버리고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의 감각을 안고 나는 존재할 수 없는 일상을 맞이한다.

 

(Tic Tac Toe 본문 中 발췌)


 

“일어났냐.”

눈을 뜨자 아직 지난 밤 꾸었던 꿈이 흐릿한 천막을 쳐두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막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정신 좀 차려라.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라고 덧붙였고 포트에서 잔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린다. 이제 그만 막을 걷고 극을 시작할 시간이기에 깜빡, 깜빡 두어번 눈을 뜨자 드물게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꿈을 꾸었을 때 라이오넬이 나왔던 것 같다. 지금보다 더 어린, 아니 젊었던 시절이라는 표현이 맞겠지. 꿈은 어느 신빙성 없는 괴담에나 나올법한 괴물처럼 눈을 뜨자마자 햇빛을 마주하고 한 줌도 되지 않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던지라 무엇도 확신하지 못 하고, 그저 내밀어진 컵을 받아 축이듯 조금씩 넘겼다. 넘어가는 물은 장작을 아낌없이 태워 훈훈한 온도가 도는 방에서 적절히 미지근하게 식은 채였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물. 자신이 언제쯤 일어날지 예상하고 데워왔을 것을 생각하자 방금 물을 마신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두 손으로 컵을 쥔 채로 바닥을 드러내는 물을 바라보다 시선을 올린다. 새삼스러웠지만 여전히 타인의 호감을 사기 쉬운 얼굴이었다. 상식처럼 꺼내려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의 나이는 결혼 적령기를 넘은지 오래였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좋은 여자를 만나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올테지. 이제는 인정하기 싫다는 치기어린 마음도 수그러들은지라 담담히 잘난 녀석이니까. 생각으로 했던 말은 제어할 틈도 없이 입 밖으로 웅얼거림이 흘러나간다.

 

“뭐라고?”

“…아무것도.”

“싱거운 녀석.”

인정하기 싫다는 치기어린 마음이 수그러든 것과 입 밖으로 내보내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은 다르다. 변명과도 같은 생각에 여전히 덜 자랐다는 생각이 콕콕 쑤셔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몸은 왜 내 편을 하나 안 들어주나. 언제나 그래왔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크게 느껴저 한숨을 쉬며 컵을 옆 탁자에 내려두었다.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자 눈이 얕게 쌓여있었다. 간밤에 눈이 오더라. 일어나면서 흘러내린 담요를 전시된 상품처럼 개던 녀석이 한 마디 건네온다. 시선을 담요에 둔 것 같았는데. 옆통수에도 눈이 달린거 아냐? 의심을 한 가득 담아 바라보자 피식 웃으며 담요를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잠깐, 안 달렸다고 말하려고 했지.”

“오. 드디어 눈치란게 생겼는데. 그래, 사람은 성장을 하는 동물이지. 개체마다 성장 속도에 차이가 있지만 너도 성장은 하는군.”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던가.”

“언제나 그래왔지.”

 

그랬던가. 대답 대신 벅찬 숨이 길게 내뱉어진다. 원래도 약한 몸은 최근들어 점점 악화되었음을 의사가 아니어도 확인할 수 있었다. 벅차게 숨을 뱉어내느라 내려진 시선에 마른 손이 들어온다. 침대 옆으로 시선이 돌리자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은 탁자에는 내가 내려놓은 물잔과 작은 시계가 보였다. 12시를 진작 넘긴 시간. 남들은 진작 일어나 하루 일과를 보내다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버석하게 마른 목소리로 답 하자 낡은 문이 열리고 익숙한 하녀가 한 명 들어온다. 하지만 일상에 있던 하녀는 아니었다. 대체로 식사를 비롯해 자신의 편의에 관련된 사항은 니나가 처리했기에 습관처럼 니나를 찾으려다, 최근에 결혼했지. 저택에 결혼할 남자까지 데려와 소개시켜 주었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적당히 재산이 있는 남자였던지라 니나가 알게모르게 내비쳤던 가족에 대한 걱정을 덜어서 다행이라고 생각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아쉬움이 가득한 기색으로 잔소리를 가득 남기고 간 뒷모습까지 되새기고 나서야, 안 먹냐? 핀잔같은 잔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눈앞에 차려진 식사에 시선을 둔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스프가 오목한 접시 안에 담겨있었고 옆에 연갈색으로 알맞게 구워진 먹음직스러운 빵이 바구니에 쌓여있었다. 그 앞에는 신선한 샐러드 위에 과일과 치즈를 풍부하게 올렸고 작은 그릇에는 샛노란 마멀레이드 잼이 담겨있었다. 식사라고 칭하기엔 부실했지만 주치의는 힐끔 보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너는 안 먹어?"

"누구랑은 달리 진작 먹고 누구가 일어나길 기다렸지."

한 마디를 안 져요. 투닥거림을 이어가는 대신 스푼을 들어 스프를 먼저 떠먹었다. 기숙학교에서 먹은 뒤늦게 물맛에 가까운 스프가 아니라 우유와 버터, 그리고 다른 재료를 아낌없이 써 각 재료의 맛이 알맞게 어우러진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따지자면 익숙함정도는 기숙학교에 잠깐 있던 몇 년이 아니라 졸업 후 제대로 집안을 물려받아 이어왔던 지금과 같은 식사가 익숙하였지만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분명 영어로 적혀있지만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종이뭉치를 넘기는 녀석이 있다보니 저절로 기숙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더 버티지 못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도 작은 불을 밝히고 무섭게 공부했지. 종이뭉치에서 겨우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저자에 적힌 사람의 직업과 이름정도였다. 라이오넬은 자신의 위대함에(그의 표현을 빌려서다.) 떠벌리기를 매우 좋아했는데 의학계에 자신의 이름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도 이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런 구석까지 처박힌 곳에 오는 신문에 이름이 실린 소식을 보았을 때도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듯 그게 그렇게 신기하냐고 핀잔까지 주었다. 사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잘은 모르지만 의사는 매우 많은 공부를 해야하는 직업이었고 해온, 해야 할 공부의 양에 따라오는 명예는 낮았으니까.

 

그런데도 고학년 때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직업을 얻어낸 것도 모자라 의학계에 이름까지 실리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지만 대단한 일이겠지. 분명 콧대를 잔뜩 세우고 자랑을 늘어놓아도 모자랄 성격이었다. 가끔 궁시렁대는 소리를 들어보면 진로를 바꾼 이유로 크게 틀어졌던 아버지와의 사이도 회복되려는 기미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직업인으로, 가족구성원으로 무엇 하나 빠지지않는 성과를 이루어냈는데도 자랑은 커녕 언급조차 하려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 갑작스럽게 진로를 바꾼 이유와 비슷할테지.

 

평생 변하지않는 존재는 시간밖에 없으리라. 매년 똑같은 순환을 반복하는 자연조차 지난 겨울과 올 겨울이 달랐다. 각자의 삶이 타고난 총량만 다를 뿐 시간은 그저 묵묵히 신분의 고저, 성별, 나이, 장소에 상관없이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흘러갔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속에서 생은 다양한 속도로 변해갔고, 그 중 내가 일구어낸 변화는 너무나 느려 변하지않는다고 착각할 정도로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그래도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워낙 느렸기에 많은 변화도 아니었다. 겹겹이 쌓여있는 베일 중 하나를 걷어냈을 뿐이었다.

 

베일을 걷고 마주한 사실을 보았을 때의 기분은 숨이 막힌다였던가. 전부 드러내지 않고 일부분만 들췄을 뿐인데도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 무게는 벅차 고개를 돌려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실은 또 다시 도망쳤다.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믿어왔던 진실을 깨뜨리기 싫어 나는 바보같게도 또 모르는 척 눈을 돌린다. 익숙하게 올라오는 자괴감이 원래도 미미한 식욕을 떨어뜨려 스푼을 내려놓았다.

 

"더 먹어."

"배 불러."

"가져왔을 때랑 차이가 보이긴 하냐?"

"더 안 들어가."

고개를 돌려버리자 라이오넬은 무어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한숨을 내쉬며 하녀를 부르는 줄을 잡아당겼다. 금세 식사를 가져다 주었던 하녀가 와 식기를 정리해 가져간다. 움직이는 손놀림이 어쩐지 기쁜 기색이 묻어나는 모양에 라이오넬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았지만 가만히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봉급이라던가, 대우라던가 집안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고 타 귀족과의 교류도 없다에 가까운지라 잘은 몰랐지만 그렇게 박하게 대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부족할테지. 니나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었고, 있는 집 자제가 모여 지내는 기숙학교에서 경험도 있던지라 그저 그러려니 두기로 하였다. 라이오넬은 이런 판단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최근들어 내게 반박과 쓴소리를 줄여갔기에 별로 말을 더하지 않았다.

 

"산책 갈래."

"별 일, 아니다. 가자."

겨울이 한창임을 증명하려는 날씨는 간밤에 눈을 소복히 내려두었다. 어린 날에도 들지 않았던 새하얀 눈을 꾹꾹 밟아보고 싶다는 묘한 충동이 일었다. 당연하다는 듯 두터운 코트를 비롯해 목도리, 장갑 등을 챙겨 꽁꽁 싸매는 주치의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터였다. 정원을 거쳐 적당히 관리하라고 말하고 신경을 끄고 사는 온실, 산책을 권하는 의사와 감기가 우려되는 의사가 내린 합의점이었다. 가자. 오랜 시간 움직임이 적었던 몸을 일으키자 익숙한 둔통이 일었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눈은 멈췄지만 날이 어두워 곳곳에 밝혀둔 등이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는 것처럼 가볍게 타올랐다.

 

* * *

 

"좋냐."

"응."

"애도 아니고, 나참."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눈을 밟는 일에 성공했다. 먼저 앞장서는 뒷모습을 보며 몰래 눈을 밟기 위해 발을 내딛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발을 살짝 든 채로 굳어서 서로 한참을 바라보다 한심함이 가득 담긴 한숨소리가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왜, 뭐. 왜. 그럴 수 있지. 괜히 찔린 사람처럼 불퉁히 쳐다보자 재차 한숨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만이야. 얕게 쌓였는데도 냉기가 올라와 몇 번 꾹, 꾹 밟아 의미 없는 모양을 만들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눈에서 시선을 떼었다. 온실은 멀지 않았기에 어쩐지 조금 빠르게 걸어가 열어준 문 안에 들어서자 훈훈한 온기가 그새 얼어버린 몸을 부드럽게 녹여주었다.

 

나오는 길에 하녀를 잡아 무어라 하더니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하인과 하녀가 들어서 테이블과 의자를 내려놓은 후 깨끗하게 닦은 후 테이블보를 깔고 그 위에 차를 우리기 위한 도구와 샌드위치, 쿠키, 푸딩 등을 비롯한 간식을 내려놓고 발소리를 죽여 나갔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어이없이 쳐다보았지만 정작 원흉은 무엇이 문제냐는 의사를 어깨를 으쓱이며 전달하며 차를 탈 준비를 한다. 능청스럽고 준비성 철저한 자식. 욕인지, 칭찬인지 발화자도 모를 말을 중얼이며 자리에 앉자 손이 빠르게도 차를 우려 향긋한 차 냄새가 녹음 냄새에 적절히 섞여 몸을 더욱 풀어주었다.

 

기숙학교에서 차를 배운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시키는 심부름. 악에 가까운 관습은 착취당한 저학년을 보상받고 싶은 심리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을 터였다. 차를 우리라는 명령과 비슷한 부탁을 들었을 때 멍청히 서있던 때도 있었다. 어떻게 배우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배우는 과정에서 얼마나 잔소리와 구박을 들었는지는 기억이 났다. 절로 떠오르는 목소리를 고개를 저어 쫓아낸다.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다.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유난히 기숙학교 시절이 자주 떠올랐다. 꿈 때문인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면서 절로 꿈에게 핑계를 돌린다. 하,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 정말 변함이 느리구나. 혼자 고개를 내젓고 한숨을 쉬어대는 내게 시선이 꽂혔다. 이어 모락모락 김을 피워내는 붉은 찻물이 담긴 하얀 잔이 내밀어졌다. 분명 고개를 들면 괴이한 사람을 보듯이 쳐다보고 있을테지. 일부러 고개를 돌리며 차를 머금자마자 익숙하지 않는 단맛이 입을 감쌌다. 라이오넬이 이런 실수를? 보지 않으리라 했던 다짐이 1분도 되지 않았다는 생각은 구석으로 밀어내고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자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이 기다리고 있다. 저 표정은 내가 뭘? 이라고 묻는 뻔뻔한 표정이었다. 분명 아까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설탕을 잔뜩 넣은게 분명했다. 테이블 위를 제대로 살피자 샌드위치에는 쨈과 크림이 듬뿍 발라져있었고, 쿠키는 초코칩이 아낌없이 박혀있었으며 푸딩은 안에 담긴 쨈이 흘러넘칠정도였다. 그나마 덜 달아보이는 스콘을 집어들어 씹었다.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영향력이 커진거지. 주인의 식성보다 주치의의 의견이 중요하다니. 서글프게 다시 잔을 기울인다.

 

"어제 서신 왔어. 유언장 공증 절차가 끝났다고."

"알아. 내게도 서신이 왔거든."

"덕분이야."

"이제야 내 능력을 알았냐? 언제나 깨닫는게 느리군."

"아, 취소. 취소."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라이오넬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막판에 갑자기 진로를 바꾸었지만 그간 쌓아온 지식을 무시할 수 없었고, 사회생활을 하며 겪은 경험을 통해 유언장에 증인이 필요하다는 사실만 알고 있던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 집안은 아주 파티를 하겠어. 비꼼이 가득한 어조였지만 어색히 웃으며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아주 단 음식만 준비하지 않았는지 쌉싸름한 단맛이 씹힌다. 부인도 없었고, 양자로 들인 자식도 없었으니 내가 죽으면 당연히 방계가문 중 가장 직계에 가까운 가문이 윌프레드의 성을 이을터였다. 그런데도 평소 교류 하나 없던 가문의 자식을 상속자로 지정한 이유는, 글쎄 알 수 없었다. 이름이 같으니 운명같지않냐고 어설프게 둘러댄 변명을 모를리 없었지만 라이오넬은 결국 유언장에 서명을 해주었고 공증까지 마쳐 법적 효력을 지니게 되었으니.

 

찻잔에 담긴 붉은 액체는 라이오넬의 뒤에 피어있는 붉은 꽃과 닮았다. 계절에 맞지 않는 알록달록하고 선명한 색은 외국에라도 온 기분이 들었다. 자주 오지 않았지만, 올 때마다 유지하고 있기를 잘 했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하며 찻잔을 마셨다. 쌉싸름하게 남은 맛을 폭 덮어주는 단맛이 감돌았다. 쓴맛과 단맛. 금세 물려 잔을 내려두자 그럴 줄 알았다는 콧김소리와 맹물이 따라졌다. 저럴거면서 말이지.

 

유언장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물을 마신 잔을 내려놓는 소리까지 울리자 간간히 울리는 바람 소리 외에는 고요한 침묵이 자리잡았다. 원래 이렇게 말이 없었던가? 원래 우리는 이렇게 침묵했던가. 어쩐지 어색하면서도 익숙했다. 방금까지 핀잔과 반박이 주를 이루었지만 분명히 나눈 대화가 꿈처럼 아득했다. 그래, 꿈. 아침부터 꿈은 내용조차 흐릿했지만 자꾸만 발목에 감겨들었다. 꿈이 말을 걸리도 없었지만 마치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애원같아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라이오넬."

"응?"

"꿈을 꾸었어."

"무슨 꿈을 꿨는데?"

내가 무슨 꿈을 꾸었냐면.

 

말문이 막혔다. 무슨 꿈을 꾸었더라. 분명히 꿈을 꾸었다. 꿈과 실제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사실을 알면서도 며칠은 잠들었어야 꿀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아주 긴 꿈을 꾸었다. 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던 것 같았다. 각색된 연극처럼 진행과 연기하는 배우만 다를 뿐 엔딩은 같은 꿈을 꾼 것도 같았는데.

 

"이집트 왕이 되어 하렘 제국을 건설하여 옆구리에 미녀를 잔뜩 거느리고 있는 꿈이라도 꿨냐?"

아.

 

분명 장난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고, 놀림마저 섞인 어조였다. 나는 이에 그건 너나 꿀 꿈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게 현실이  맞으니 어서 꿈에서 깨게 해달라고 대답하거나. 그래야 맞다. 아니, 그래야 맞는 것이 아니라 그랬던가? …이런 상황이 있었나? 알버트, 알버트?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여전히 꿈 내용은 얇은 베일로 겹겹이 덮어둔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분명. 꿈에서 분명.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

"…라이오넬."

"사람이 부르면! 후, 대답을 하라고…."

라이오넬이 드물게 놀란 표정이었다가 안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땀이라도 흘렸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급격하게 속이라도 타는지 찻물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건수를 잡았다는 생각을 대신하여 말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내가 죽는 꿈."

"…뭐?"

"내가 죽는 꿈을 꿨어."

"……."

그래. 한 꺼풀 벗겨낸 꿈의 내용은 내가 죽는 것이었다. 분명 아주 사무치고, 많은 감정을 느꼈던 것도 같았지만 그것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법 많은 꿈을 반복할 동안 나는 죽었다. 총을 맞아 죽기도 하였고, 계단에서 떨어져 죽기도 하였으며,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어딘가에 갇혀 얼어죽기도 하였다. 꿈이었지만 새삼 죽음을 맞이할 때의 공포가 떠올라 손이 저절로 떨렸다.

 

"…오래 살거야."

"라이오넬?"

"오래 살거라고. 알버트. 너는, 오래 살거야."

"……."

이번에는 침묵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또다시 익숙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너의 표정은 어딘가 괴롭고, 서글퍼보여 보기가 어려워 시선을 피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이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바랐지만 이제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안다. 의사는 아니었지만 심장은 과거보다 더욱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다고 감이 왔고, 이 사실은 누구보다 눈앞의 사람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오래 살거야. 서로 입을 연 사람은 없었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라이오넬.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 한 이름이 맴돌다 힘을 잃고 스러졌다. 꿈을 꾸고, 반복했을 때의 내용은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너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죽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의도와 무의식을 반씩 섞어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두터운 옷을 입었고, 감각을 느끼기엔 메마른 손은 가냘프게 뛰는 심장박동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 했다.

 

"알버트. 나는, 나는 네가."

라이오넬은 라이오넬 이스터브룩답지 않게 말을 잇지 못 하고 다물었다. 왜인지 이어질 뒷 말을 알 것 같았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오랜 시간 너를 보아온 탓일까, 차마 뱉어내지 못 한 말이 예상이 갔다. 그 말이 이 생에서 한 번도 내게 하지 않았던 말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로썬 도무지 대답해줄 수 없는 바람이자, 부탁이었고, 애원이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또 다시 어리석게도, 외면하였다.

 

시선을 조금 들자 잔상처럼 잘게 떨리는 어깨와 너머로 해가 짧은 탓에 벌써 어둑해지는 하늘이 보였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라이오넬. 돌아가자. 조금 특별한 일이 있었지만. 오늘은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다.

벌써 이 저택을 나가지 못한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지.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은 날짜를 세볼까 고민하다가 날짜를 세는 것에 하등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기로 했다. 실제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쁠 것이라면 모를까. 라이오넬이 이 저택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은 눈과 같은 물리적인 이유에 의해 저택이 고립되어 실제로 나갈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나갈 수 없었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원인은 한 남자에게 있었다.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은 자신이 나가지 못한 원인을 힐끗 눈에 담았다. 완연한 병자의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흐트러진 흑색 머리칼과 꼭 감은 눈꺼풀. 한없이 처연해 보이는 남작,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였다. 그는 원래도 병약해서 아파 보이는 상이긴 했지만 지금은 거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얼굴이었다. 피부의 색이라곤 물에 씻겨 빠져나간 듯 창백했고 팔이나 다리는 축 늘어진 채였다. 그는 미약하게 숨을 쉬고는 있었지만 때때로 그마저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처럼 콜록거렸다.

이런데 어떻게 나갈 수가 있겠어. 라이오넬은 그렇게 생각하며 호흡만 겨우 하는 알버트의 머리칼을 살짝 손으로 쓸었다. 밤중 앓았던 흔적으로 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긴 후에 라이오넬은 그저 알버트를 한참 눈에 담았다. 이렇게 의식을 잃은 알버트를 혼자 바라보는 것도 벌써 몇 번째였다. 라이오넬은 그 사실을 떠올리다가 그저 눈을 꾹 감았다.

 

단순히 어제 알버트가 운이 나빴기 때문에 알버트가 앓은 것이 아니었다. 라이오넬은 그렇게 생각하며 근래 있던 일을 떠올렸다. 최근 알버트는 지나치게 자주 앓았다. 잠깐 열이 오른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거나 하는 일은 알버트가 특별히 아프지 않아도 그의 체력상 자주 있는 일이긴 했지만 최근에 있던 것은 그런 소소한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종류의 병증이었다.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는 근래에 정말 ‘죽을 것처럼’ 앓았다. 호흡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을 라이오넬이 겨우 발견해 숨을 쉴 수 있게끔 조치하거나, 우연히 시중을 들러 들어온 하녀가 그 주인이 의식을 잃고 거의 시체처럼 늘어진 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는 일이 잦았다.

잠시 아프고 나으면 괜찮은 상황이 아니었다. 하루 걸러서 하루가 아팠고 그나마 잠시 앓지 않으면 그것이 행운일 정도였다. 이제는 알버트가 운이 나빠서 앓는 것이 아니고, 앓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앓지 않으면 운이 좋은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그래서 라이오넬은 저택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찰나의 공백이 알버트 윌프레드의 생명을 완전히 앗아가게 될까 봐. 늘 청진기로 들었던 미약하던 고동이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멈추는 일이 일어나게 될까 봐 라이오넬은 자신의 의지로 저택을 나서지 않았다.

 

이틀 전쯤에는 저택에서 영 벗어나지 않는 라이오넬이 걱정이 되었던 것인지 알버트가 말을 하기도 했었다.

 

“난 괜찮아.”

“…….”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라이오넬. 계속 여기에 있지 않아도 돼.”

 

알버트는 그때 꼭 라이오넬을 어르는 연장자처럼 말했었다. 진정하지 못하는 아이를 달래는 선생의 목소리가 이랬었나. 기숙학교 시절 들었던 교사진의 목소리와 얼핏 비슷한 것도 같았다. 그러나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은 그 다정한 목소리에 꼭 반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소리로 흐를 것 같았던 조소를 억누른 것이 그의 한계였다. 우습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하고 있군. 라이오넬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당시의 알버트를 눈에 담았었다. 그때 알버트는 어땠지. 창백했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생기가 없었으며……. 라이오넬은 무겁게 감았던 눈을 떠서 알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 얼굴이었다. 지금과 다를 바 없었던 얼굴로 그는 자신을 마주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던 그 연약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알버트에게 그때의 나는 말했었다.

 

“너 어제도 발작을 일으켰던 건 기억하고 하는 말이냐?”

네가 내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그렇게 말했었다.

 

“…….”

“네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었는데 듣지도 못하는 것 같았고.”

“그건…….”

 

너 거의 죽을 뻔했어. 그리고 그게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잖아.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은 그 말을 꾹 삼키고는 입술을 물었다. 그런 주제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 정말 걱정을 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라이오넬은 굳이 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입술을 짓이겼다. 입술을 물지 않으면 소리가 샐 것 같았는데 샐 소리가 말소리가 아니라 흐느낌에 가까운 무엇인가일 것 같아서 그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행인지 혹은 불행인지 알버트는 그이상 라이오넬을 달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살짝 눈을 감았었다. 그마저도 꼭 영원히 잠이 들 것만 같아서 라이오넬은 알버트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하지만 라이오넬이 잠에 빠질 알버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가 먼저 말했었다.

 

“나는 네가 걱정 돼…….”

알버트 윌프레드는 그 말 뒤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라이오넬은 알버트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굳이 묻지 않았고 알버트는 굳이 그 다음을 이어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눈을 떠서 덤덤한 톤으로 시답잖은 얘기를 했을 뿐이다.

 

“……아무래도 나가지 않고 오래 머물 거면 집세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하고. 전혀 마음이 담기지 않은 너스레에 라이오넬은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이면 네가 오래 살아서 직접 받아내도록 해. 몇 년 치를 한 번에 청구 받아도 기꺼이 지불하도록 하지.”

알버트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가 짓는 웃음마저 희미해서 라이오넬은 당장에라도 눈앞 남자의 상이 흩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 대화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이런 꼴이군. 라이오넬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알버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네 말은 전부 틀렸다고. 그때 내가 네 말을 따라서 저택을 나섰으면 네가 숨을 쉴 수나 있었을 것 같으냐고. 네 목숨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거거나 자신을 과신하고 있는 건 아니냐고. 흡사 책망하는 것 같은 소리가 먼저 머리를 스쳤다. 의사로서의 충고를 한바탕 쏟아내면 알버트는 목을 움츠리곤 움찔거리거나 아니면 지나친 잔소리에 한숨을 푹푹 내쉬겠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반응이 선할 만큼 익숙하고도 평범한 대화였다.

라이오넬은 문득 그것이 평범한 대화라는 것에 부정할 수 없는 지점을 마주했다. 대부분 사람은 일상적인 얘기를 이제 와서 굳이 특별히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범주에 넣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나면 속에 품어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소진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하고 혹자가 물어본다면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넬이 품은 것은 그보다 깊은 것이었고 떠올린 것은 하고 싶은 말 중에서도 할 수 있는 말에 해당하는 지극히 적은 부분의 이야기였다.

그래, 나는 좀 더 많은 얘기를 담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어쩌면 알버트 윌프레드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라이오넬은 알버트가 눈을 감고 시선이 닿지 않을 때면 그나마 솔직할 수 있었다. 그 푸른빛이 도는 눈이 자신을 마주하지 않으면 나약한 것을 꺼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든 라이오넬은 자신이 차마 소리로 내뱉을 수 없을 속내를 떠올렸다.

 

알버트 윌프레드. 그렇게 죽음을 직감한 것처럼 굴지 마. 죽음에 순응하는 것처럼 굴지 마. 꼭 남겨질 사람을 걱정하는 것처럼 나를 걱정한다는 말 따위를 굳이 남기지 마. 그게 당연한 것처럼 덤덤히 받아들이지 마. 나는 네가, 조금 더…….

라이오넬의 상념은 그곳에서 멈추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넬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알버트의 시선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시선이 닿은 순간 입을 다물어야 했으니까.

 

어느새 꼭 감겨서 두 번 다시 뜨이지 않을 것 같았던 알버트 윌프레드의 두 눈이 라이오넬을 마주하고 있었다.

 

“라이오넬……?”

“…….”

 

알버트 윌프레드는 꼭 꿈을 거니는 것처럼 붕 뜬 목소리로 라이오넬을 찾았다. 수분을 머금지 않은 목소리가 다소 퍽퍽하게 들렸지만 라이오넬은 그의 목소리가 마른 것보다는 꼭 다른 세계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뱉어내고 싶었던 말할 수 없는 것을 입안에서 녹여 삼키기에도 여념이 없었다. 다행히 그가 말을 부수어 뭉개기 전에 알버트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알버트는 거의 반사적으로 라이오넬의 이름을 부른 후에 한참을 침묵했다. 실은 라이오넬이 보여서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은 아니었다. 깨어 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머리는 멍했고 심장은 여전히 불안하게 뛰었으며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몸에 열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무언가를 정상적으로 판단하고 그 감각을 믿기에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알버트는 그때 자신의 방인지조차 낯선 이 공간에 있는 이가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이라고 확신하고 말을 뱉을 수 있었다. 시야로 보고 판단하기에는 부옇던 시야였다. 알버트는 그때 라이오넬의 얼굴을 채 보지도 못했었다. 그러나 그때 알버트는 라이오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 수밖에. 알버트는 슬슬 개이기 시작하는 시야에 살짝 눈을 굴려 라이오넬을 눈에 담았다. 힐끔 건넨 시선으로 겨우 볼 수 있었던 라이오넬의 표정은 알버트 윌프레드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몇 번의 죽음의 고비를 건널 때마다 그가 지었던 표정이었다. 그것을 슬픔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비틀려 있었고, 분노라고 표현하기에는 잔잔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아니라고 표현하기에는 감정이 깊었다. 어떤 것도 결국 담지 못한 무표정한 얼굴. 그것은 알버트에게 지나치게 익숙한 것이었다.

표정을 관리하고 남을 구슬리는 게 특기인 주제에. 알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라이오넬을 바라보다가 쓰게 웃었다. 죽음에 누구보다 가까운 직업을 가진 주제에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지으니까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 알버트 윌프레드는 속으로 읊은 그것이 그리 유쾌하지 않은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버트 윌프레드는 그가 크게 앓기 전부터 자신이 죽음을 앞두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근처를 슬금슬금 죽음의 기운은 돌았지만 최근에 와서 죽음이라는 것은 거의 이를 드러내고 알버트를 먹어 치울 것처럼 굴었다. 그것은 꼭 알버트가 살아온 모든 기간 인내했던 것을 이제야 앞둔 사람처럼 조급하게 그를 흔들었다. 병에 대해서는 라이오넬이 알버트의 몇 배를 더 잘 알겠지만 죽음의 기운에 대해서는 알버트가 훨씬 익숙한 법이었다. 알버트는 그는 지나치게 많은 죽음을 보아왔다. 죽음의 기운을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하긴, 오래 참긴 했지. 자신을 몇 번이고 먹어치웠던 게 몇 해 전이니. 알버트는 문득 그렇게 생각하다가 지나치게 익숙한 죽음들 가운데서 저택에 내려앉았던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알버트는 힐끗 창문을 눈에 담았다. 커튼으로 쳐진 창문은 건너편이 보이지 않았지만 알버트는 꼭 그 건너에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새하얗게 내린 눈이 온 천지를 덮어서 이 저택에 사람들을 가두고……. 라이오넬이 들으면 소설이 따로 없다고 핀잔을 하겠군. 알버트는 그렇게 생각하곤 픽 웃었다가도 끊이지 않은 사고의 흐름을 따랐다.

몇 해 전이었다, 자신의 생일을 맞은 연회를 열고자 했던 것이. 그리고 그 연회를 위해 모였던 손님과 자신이 몇 번이고 죽으며 저택에 피를 먹였던 것이. 알버트는 몇 번이고 죽었던 그 겨울을 떠올렸다. 머리를 뚫던 총알의 감각이 퍽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 같아서 잠시간 손을 떨었다가 꾹 쥐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알버트는 약간 상념에 젖은 것 기분으로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 자신은 몇 번이고 죽었고 몇 번이고 살아났다. 계기나 상황에 대해서 세세하게 떠올릴 수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이제 과거에 불과한 일이 되었기 때문에 알버트는 굳이 그 낡아빠진 참극을 꺼내려 들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만 기억하는 참극이기도 했지. 알버트는 아주 운이 좋게 참극의 끝에서 한 번 더 기회를 얻어서 살아남은 자신을 떠올렸다.

자신이 죽음이라는 존재였다면 이미 수도 없이 먹어치운 기억이 있는 먹잇감이 살아남은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을 법도 하다는 생각이 잠시간 들었지만 그는 그 생각을 지웠다.

 

중요한 건 그따위 것이 아니지.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겪을 수 없는 것을 겪고 죽음을 넘어선 자신은 그 뒤에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다. 이렇게 말하면 라이오넬은 되바라진 놈이라고 혀를 찰 터이지만 주치의의 신분으로 그가 얼마나 말을 하든 듣지 않았던 것들을 챙겼었다. 걷지 않았던 몸을 손수 움직이기 시작했고, 햇볕을 쬐고……. 알버트는 그런 가운데서 만났던 인연들을 생각했다. 이제는 앙금이 남아있지 않은 옛 연인과, 자신의 이름을 닮은 작은 아이와, 또……. 알버트는 잠시 라이오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라이오넬을 얻었었지. 내내 얘기하지 못해서 쌓였던 앙금이 남았던 친우와 화해를 하고 지금까지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알버트는 그 모든 것이 꽤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노력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과정을 그는 꽤 사랑했었다.

 

어쩌면 그래서 문제인 건가. 알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잠시간 숨을 멈추었다. 그 모든 과정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언젠가의 말버릇처럼 여태까지도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늘어놓고 있을 텐데. 어쩌면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죽음에 태연한 척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렇지 않았다.

 

알버트 윌프레드는 이제 와서 뒤늦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알버트는 살고 싶었다. 단조롭게 흐르던 시간들이 사실은 그저 흐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의 시간 사이로 수도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인간이 미래를 걸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알버트는 자신의 주변에 두게 된 사람들의 미래를 곁에서 보고 싶었다. 그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는 세계는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더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버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몇 해를 더 버틴 것만으로도 용한 몸이다. 슬금슬금 무너지던 것이 이제는 끝이 날 때가 진작 되기도 했다. 그것을 아등바등 버텨왔었던 게 지난 몇 해였던 거겠지. 알버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욕심은 이미 충분히 냈다는 것을 알았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은 단지 비관일 뿐이었으며 거짓에 불과했다. 알버트는 여전히 더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더는 바랄 수 없는 선이 있는 법이었다. 알버트는 그 선에 끌려가기 전에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죽음에 삼켜질 수밖에 없다면…….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라이오넬이 다가오는 소리가 방안에 옅게 퍼졌다. 알버트 윌프레드는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친우를 바라보았다.

 

“몸은 좀 괜찮아?”

“괜찮다고 하면 믿을 거야?”

“믿겠어?”

 

믿을 소리를 해야지. 라이오넬은 여전히 병색이 완연한 알버트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알버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여전히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채로 눈만 겨우 움직여 라이오넬을 바라볼 뿐이었다. 알버트는 라이오넬의 약간 쏘는 듯한 소리에 꼭 바람이 빠진 소리로 살짝 웃다가 말했다.

 

“어차피 대답도 안 믿을 질문을… 왜 한 거야?”

“네가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아야 했거든.”

 

라이오넬은 별 대수롭지 않게 알버트의 말에 대꾸하고는 알버트를 살짝 바라보았다. 의식은 차렸는데 상태는 여전히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언제 다시 의식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여서 라이오넬은 잠시 마른침을 삼키고는 이불을 다시 펴서 알버트에게 덮어주었다. 일단은 재우는 게 낫겠지. 좀 더 상황이…….

알버트 윌프레드는 자신을 향한 걱정의 시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은 밑에 손을 받치고 있으면 애정이 묻어서 번들거릴 것 같았다. 한때는 저 눈을 믿지 못한 적도 있었다. 언젠가 그가 자신을 죽여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알버트는 그게 꼭 오랜 과거처럼 느껴져서 괜히 쓰게 웃었다.

 

“라이오넬.”

“왜? 너무 많이 말하지 마. 너 몸도 안 좋은데, 이만…….”

“미안해.”

 

미안해. 너를 믿지 못했던 것도, 내 죽음을 안고 가게 했던 것도, 너를 이번에도 결국 혼자 남겨두게 될 것도.

알버트의 소리에 잠시간 라이오넬이 행동을 멈추고 알버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알버트를 보다가 물었다.

 

“……뭐가.”

“그냥.”

“얼버무리지 마.”

“말을 너무 하지 말라더니 말이 달라졌잖아.”

 

알버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라이오넬이 덮어준 이불을 잠시간 만지작거리다 다시금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언젠가 내리던 눈이 커튼을 걷는 순간 여전히 내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알버트는 때때로 꼭 눈에 갇힌 것처럼 겨울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과거와 미련과 죽은 시간만 쌓였던 겨울. 알버트는 그 겨울을 생각하다가 문득 툭 소리를 뱉었다.

 

“…봄에 무슨 꽃이 피더라…….”

알버트 윌프레드는 봄이 보고 싶었다. 과거로 이루어진 죽은 시간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알버트에게 봄은 단순히 계절이 아니라 미래였다. 자신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미래. 감히 탐낼 수 없는 그런 미래. 이미 분에 넘치게 손에 넣었으면서도 더 쥐고 싶어지는 것……. 알버트는 잠시간 꼭 눈에 파묻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알버트의 상념을 깬 것은 라이오넬의 목소리였다.

 

“꽃? 관심도 없었잖아? ……보고 싶어?”

“어?”

“아니, 온실에서 정도라면 꺾어다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꽃이 보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것은 단지 은유에 불과했다. 예상치 못한 답에 알버트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라이오넬을 바라보다가도 꺾은 꽃과 온실에 꼭 언젠가 받았던 노란 꽃이 생각났다. 별것도 아닌 그 꽃다발을 봄이라고 칭하며 건넸던 어떤 소녀가 떠올랐다. 그 봄은 이미 시들어서 버려졌었지…….

알버트는 잠시 입술을 달싹인다. 그 꽃을 받는다고 그게 봄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설령 봄을 알버트는 잠시간 고민하다가 툭 소리를 냈다.

 

그럼 꺾인 꽃 말고, ……살아있는 꽃을 보고 싶으니 온실로 데려다줘. 라고.

 

라이오넬은 주변을 힐끗 눈으로 담았다. 따스한 온도에 여기저기가 유리로 된 형태의 공간은 명백히 알버트의 방이 아니었다.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만 주변을 둘러 보아도 꽃의 내음이 나는 이곳은 알버트가 데려다 달라고 했던 온실이었다.

갑자기 무슨 온실인지. 라이오넬은 몇 번이고 알버트의 말에 ‘너 몸을 무리해서 움직이고 더 앓아누울 생각이야?’라고 물어보면서 타박했지만 알버트는 왜인지 끈질겼다. 움직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에 왜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데려다주지 않으면 혼자 걸어서 꽃을 봐야겠다고 말하는 통에 알버트를 데리고 온실로 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그대로 두려고 생각했지만 침대에서 버둥거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옮겨야 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오기는 했지만 라이오넬은 여전히 썩 내키질 않았다. 알버트 윌프레드는 걷는 도중에도 휘청거렸고 지금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자신이 거의 안아다 옮기다시피 온실로 들어섰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꽃을 꺾어주겠단 말도 하지 말걸. 괜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알버트에게 닿는 몸에 열이 느껴지는 것이 걱정되었다. 온도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것처럼 축 늘어진 시체로 보이는 것은 그 나름대로 문제였지만 열이 오르는 것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든 전부 좋은 징조가 아닌 것 같지만…….

 

억지를 부린 것은 알고 있는데 그때 왠지 그러고 싶었다. 그것이 꼭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만 같았어. 알버트는 안 된다고 말리는 라이오넬을 우겨서 들어온 이 공간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온실은 어디까지나 만들어진 것이었고 이곳에 들어온다고 봄을 맞을 수 있는 것도 왜 이렇게까지 쥐고 싶었던 건지. 어쩌면 몸에 오르는 열이 사고를 막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원초적인 욕망에만 솔직해져서 그저 살아남고 싶다는 그 바람 하나로 억지를 부리게 되는 거지……. 알버트는 자신이 썩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알버트는 끝끝내 도착한 온실을 눈으로 슬쩍 담았다. 이름도 모를 갖가지 꽃이 눈에 들어왔다. 봄을 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봄에 피는 꽃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온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밝았고 온실 내부는 평온하고 잔잔했다.

이런 곳에서 잠들면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알버트는 잠시간 그런 생각을 하며 이제 뜻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애써 가누고자 했다. 성큼 다가왔던 죽음의 기운이 어슬렁거렸다.

 

“정말 꽃이네…… 진짜 봄 같다.”

라이오넬은 알버트가 뱉은 소리에 알버트를 따라 시선을 던졌다. 알버트의 시선 끝에는 웬 노란 꽃이 머물렀다. 저게 봄에 피는 꽃이던가? 그런 의문이 일순간 스쳤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알버트의 목소리에도 점점 열이 차올랐다.

 

“……그래. 이제 봤으니까 돌아가는 건 어때. 너 몸도 안 좋고.”

쉬어야 할 것 같아. 가서 치료도 받아야 하고. 라이오넬은 그런 말을 뱉고자 했지만 라이오넬이 무어라 얘기하기 전에 알버트가 꼭 열에 달은 숨과 함께 끊기는 소리로 웅얼댔다.

 

“봄을 맞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야가 점점 부옇게 번진다. 알버트는 자신이 보고 있던 꽃이 그저 노란 뭉텅이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알버트?”

 

“그런데 눈에 파묻혀서 그럴 수 없을 것 같았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알버트는 당장에라도 눈을 꾹 감고 말 것 같았다.

 

“알버트!”

 

“그래도 사실은 좀 더 살아가고 싶었어…….”

알버트 윌프레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누구에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알버트의 목소리가 점점 허공을 뜨는 것처럼 들렸다. 라이오넬은 그것이 꼭 이 공간에 있는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득한 어딘가에 속삭이는 것 같아서 퍽 불안함을 느끼고 알버트를 살짝 흔들었다. 알버트는 거부 없이 흔들리다가 그 행동이 멎자 축 늘어졌다. 그는 꼭 마지막 소리를 남기듯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라이오넬. 가장 행복할 때 죽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죽음을 직감한 순간 더 삶을 추구하면서 후회하게 될 것 같거든…….”

알버트는 그 소리와 함께 숨을 가늘게 뱉다가 아예 의식을 놓은 것처럼 눈을 감았다.

 

알버트는 꿈을 꾸었다. 다시금 맞은 봄에 좀 더 자란 자신의 이름을 닮은 아이와 함께 꽃을 보러 가는 꿈이었다. 그 곁에는 라이오넬이 있었으며 그는 퍽 익숙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처럼 굴었다. 그 정도는 이제 익숙하다며 받아내고자 했으나 라이오넬은 그때 인상을 찡그리는 대신 좀 가라앉은 표정을 했다. 알버트는 그것이 자신을 착잡하게 보던 라이오넬의 표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곧 죽을 자신을 염려하는 안타까운 이의…….

 

“……!”

알버트 윌프레드는 숨을 들이 삼키면서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컴컴했다. 아까는 그래도 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온실에서 의식을 잃었던 것은 알았다. 몸이 꼭 떠오르는 것 같다가 그대로 추락해서 축 늘어졌었다. 몸에 한기가 느껴져서 이불을 괜히 꽁꽁 싸맸다.

이건 현실인 걸까? 이렇게 추우니까 현실일지도 모른다. 꿈에서 생생하게 고통을 느낀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알버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깼어?”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의 목소리였다. 알버트는 뚝뚝 끊기는 기억 속에도 자신이 라이오넬에게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했었던 그 사실만은 기억해서 말을 한참 골랐다.

 

“너 움직이는 소리 다 들었어.”

“음…….”

 

깨긴 했어. 하지만 언제 다시 의식을 잃을지는 모르지. 알버트는 그 말을 하려다가 괜히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아서 입술을 달싹이곤 그저 이불을 폭 끌어안았다.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어쩌면 열이 올랐던 것은 잠시고 이내 차갑게 식어서 시신이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죽음의 기운은 아직 주변을 돌고 있었으며 사실 이 찰나의 생존도 그저 운이 좋아서…….

 

“또 헛생각이나 하고 있군.”

“…….”

“네 표정은 다 보여. 불이 꺼져있든 꺼져있지 않든.”

“거, 짓말…….”

“그래. 거짓말이야. 네가 아무런 말도 안 하니까 말 좀 터볼까 했다.”

 

알버트 윌프레드는 목이 따갑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보이지 않는 라이오넬의 표정에 애써 시선을 맞추고자 눈을 굴려 라이오넬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 온실에서 했던 얘기 말인데.”

“…윽.”

 

좀 더 의식을 잃었던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알버트는 잠시 생각했다. 그랬다가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을 것 같지만……. 아니, 죽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꽤 곤란한 상황인 것은 맞았다. 라이오넬에게는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자기 죽음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고 있는 이였다. 괜히 죽음에 대한 소재를 말해서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알버트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며 안절부절못했고 라이오넬은 그러한 알버트 위로 말을 얹었다.

 

“좀 이상한 말이긴 했지만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어. 그러니까, 너는 네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군.”

“…….”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은 그렇게 말하며 온실에서 축 늘어졌던 알버트를 눈에 담았다. 재빠르게 받아내지 않았다면 풀밭을 굴렀을 것이다. 보고 싶다던 예쁜 꽃은 장례식에 바치는 헌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에 겨우 매달려서 끌려오던 그것은 사람보다는 사체에 가까웠다. 라이오넬은 그때 알버트의 죽음의 무게가 이 정도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가 최후에 숨이 끊겨서 완전히 죽음에 이르게 되면 겨우 이정도의 무게가 남는 것은 아닐까 하고. 라이오넬은 그 생각을 하는 자체가 자신이 불안해한다는 사실의 증거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손을 꾹 쥐고 애써 자신을 가라앉히고 알버트를 방으로 끌고 들어왔었다.

창백한 안색과 죽을 것처럼 몰아쉬는 숨. 불안한 맥박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 모든 것이 정말 죽음을 앞둔 사람의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라이오넬은 꽤 다급히 손을 놀렸었다. 열을 낮추기 위해 약을 처방했고, 계속 지켜보면서 진찰을 하고, 또…….

그러는 와중에 라이오넬은 말을 곱씹어 볼 수 있었다. 꽃을 보고 싶다고 말했던 말, 봄에 살고 싶었다던 말, 자기는 가장 행복할 때는 죽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 그 열에 오른 괴상한 말의 파편들은 결국 살아남고 싶다는 일종의 고백과 같았다.

라이오넬은 그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알 수가 없었다. 살고 싶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서 기뻐했는지, 혹은 죽어가는 몸에 좌절했었는지. 라이오넬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말로는 부정하더니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고.”

“그건…….”

“걱정하지 말라더니, 죽을 거니까 감당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군.”

“…….”

 

라이오넬은 대답도 하지 않는 알버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언제 죽어도 괜찮다는 듯이 굴었던 인간이 이렇게 성장하는 데 얼마나 걸렸었는지. 변화는 느닷없었지만 느닷없는 변화에 걸린 시간이 퍽 길었었다. 라이오넬은 그때 알버트의 시간이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살아있으니 변할 수 있는 거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그는 알버트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동시에 보고 싶었다.

 

“알버트.”

“……응.”

“아까 그랬었지. 행복할 때 못 죽을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음.”

 

알버트는 가장 행복할 때 죽었으면 좋겠다고 고했던 그의 축복을 안고 살았었다. 알버트는 이제 그 말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더 행복한 삶을 살다가 후회 없이 눈을 감을 수 있길 바란다는 소중한 말. 얼핏 듣기에 살벌한 저주를 그가 무슨 마음을 담아 건넸는지 알버트는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말을 한 것은 지금의 네가 아니지만……. 알버트는 문득 그가 하지도 않은 말에 사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떻게 말을 수습하지 고민하며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이다가 알버트는 살짝 입을 벌렸다. 그건……. 그러나 알버트의 말이 소리가 되기도 전에 라이오넬의 소리가 빨랐다.

 

“왜 나에게 미안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미안하면 어떻게든 이루면 되잖아?”

“어?”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행복해져. 언제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행복하게 살아. 다만 그래서 후회하면서 덜 행복해질 것 같다면…… 그 이유로 조금 더 살아가도록 해.”

“…….”

“언젠가 후회하게 되더라도 당장은 그러지 않도록 더 살라고.”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은 그렇게 말하며 알버트 윌프레드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열이 오른 손이 썩 기분 좋은 감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를 품은 것이었다. 라이오넬은 그 연약하기 짝이 없는 손을 꾹 잡은 채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네 목숨을 붙여놓을 테니 넌 살아가기만 해.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문득 알버트는 어둠에 시야가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내내 보이지 않던 라이오넬의 표정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채 말하는 그 표정은 최근 자신이 보던 익숙한 표정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우울감과 불안을 녹여낸 어떤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라 결연이 담긴……. 알버트는 그것이 절망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쉽게 죽을 거라고 확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굳이 정의하자면……. 알버트는 잠시 적절한 글자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굳이 정의하자면……. 알버트는 단어를 추릴 수 있었다.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라이오넬은 꼭 쥐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알버트의 손 위로 무언가를 하나 건네고 그 손바닥을 아예 꼭 주먹으로 쥐게끔 했다.

 

“……뭐야?”

느닷없이 손에 닿은 것은 차갑거나 따뜻한 것이 아니라 매우 가벼운 질감의 물건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잘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작고 가벼운 것. 이게 뭐지? 알버트가 다소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라이오넬을 바라보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꽃.”

“꽃……?”

“그래, 살아서 맞고 싶다던 봄.”

 

선물로 줄게. 라이오넬은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알버트는 라이오넬의 소리에 천천히 손에 쥐었던 것을 펴서 내려다보았다. 꽃이라기엔 둥근 형태고 꼭 반지와 같은……. 알버트는 잠시 생각하다 그것이 꽃으로 만들어진 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노란 꽃으로 만들어진 반지. 어린애나 만들 것 같은 작은 반지에 알버트는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 반지를 조심스럽게 끼고는 그 손을 살짝 들어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툭 소리를 냈다.

 

“……나 지금, 죽어야 할 것 같은데.”

아마도 가장 행복해서. 알버트의 목소리가 버석하게 말랐다. 잠긴 목소리로 답지 않은 농담을 하자 라이오넬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면서 타박했다.

 

“아직 아냐. 네 삶이 얼마나 남았는데.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 언제일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알버트는 라이오넬의 소리에 다시금 정의했던 단어를 떠올렸다.

 

결의가 담겼던 그 표정과 받은 봄……. 그것은 희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삶이었고, 이미 끊어질 뻔했던 삶을 운 좋게 연명 받아서 겨우겨우 이어나가는 덤과 같은 인생이었지만 어쩌면 정말 곁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미래를 보는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기회를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알버트는 생각했다.

당장 기분이나 열에 취해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찰나의 기분이라도 괜찮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알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이 받은 봄에 입을 맞추었다.

 

문득 반지에서 꽃의 향기가 났다.

어느새 봄이었다. 이미 봄이었다.

 

알버트 윌프레드는 그가 봄을 건넸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봄을 한껏 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도. 그는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삶을 탐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령 죽음이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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