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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론 주제 : 일상

꿈을 꾸었다.

 

내가 죽는 꿈.

 

꿈을 뜨기 직전까지 나는 울고 있었다.

 

안타까움, 슬픔, 고통, 회한에 사로잡혀서.

 

너무나도 실감나는 감각이었기에 나는 그 모든 일들이 현실이라 믿어 의심치않았다.

 

나는 죽었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뜬다.

 

그 모든 슬픔과 안타까움과 고통과 회한을 전부 꿈으로 만들어버리고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의 감각을 안고 나는 존재할 수 없는 일상을 맞이한다.

 

(Tic Tac Toe 본문 中 발췌)


 

“일어났냐.”

눈을 뜨자 아직 지난 밤 꾸었던 꿈이 흐릿한 천막을 쳐두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막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정신 좀 차려라.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라고 덧붙였고 포트에서 잔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린다. 이제 그만 막을 걷고 극을 시작할 시간이기에 깜빡, 깜빡 두어번 눈을 뜨자 드물게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꿈을 꾸었을 때 라이오넬이 나왔던 것 같다. 지금보다 더 어린, 아니 젊었던 시절이라는 표현이 맞겠지. 꿈은 어느 신빙성 없는 괴담에나 나올법한 괴물처럼 눈을 뜨자마자 햇빛을 마주하고 한 줌도 되지 않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던지라 무엇도 확신하지 못 하고, 그저 내밀어진 컵을 받아 축이듯 조금씩 넘겼다. 넘어가는 물은 장작을 아낌없이 태워 훈훈한 온도가 도는 방에서 적절히 미지근하게 식은 채였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물. 자신이 언제쯤 일어날지 예상하고 데워왔을 것을 생각하자 방금 물을 마신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두 손으로 컵을 쥔 채로 바닥을 드러내는 물을 바라보다 시선을 올린다. 새삼스러웠지만 여전히 타인의 호감을 사기 쉬운 얼굴이었다. 상식처럼 꺼내려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의 나이는 결혼 적령기를 넘은지 오래였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좋은 여자를 만나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올테지. 이제는 인정하기 싫다는 치기어린 마음도 수그러들은지라 담담히 잘난 녀석이니까. 생각으로 했던 말은 제어할 틈도 없이 입 밖으로 웅얼거림이 흘러나간다.

 

“뭐라고?”

“…아무것도.”

“싱거운 녀석.”

인정하기 싫다는 치기어린 마음이 수그러든 것과 입 밖으로 내보내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은 다르다. 변명과도 같은 생각에 여전히 덜 자랐다는 생각이 콕콕 쑤셔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몸은 왜 내 편을 하나 안 들어주나. 언제나 그래왔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크게 느껴저 한숨을 쉬며 컵을 옆 탁자에 내려두었다.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자 눈이 얕게 쌓여있었다. 간밤에 눈이 오더라. 일어나면서 흘러내린 담요를 전시된 상품처럼 개던 녀석이 한 마디 건네온다. 시선을 담요에 둔 것 같았는데. 옆통수에도 눈이 달린거 아냐? 의심을 한 가득 담아 바라보자 피식 웃으며 담요를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잠깐, 안 달렸다고 말하려고 했지.”

“오. 드디어 눈치란게 생겼는데. 그래, 사람은 성장을 하는 동물이지. 개체마다 성장 속도에 차이가 있지만 너도 성장은 하는군.”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던가.”

“언제나 그래왔지.”

 

그랬던가. 대답 대신 벅찬 숨이 길게 내뱉어진다. 원래도 약한 몸은 최근들어 점점 악화되었음을 의사가 아니어도 확인할 수 있었다. 벅차게 숨을 뱉어내느라 내려진 시선에 마른 손이 들어온다. 침대 옆으로 시선이 돌리자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은 탁자에는 내가 내려놓은 물잔과 작은 시계가 보였다. 12시를 진작 넘긴 시간. 남들은 진작 일어나 하루 일과를 보내다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버석하게 마른 목소리로 답 하자 낡은 문이 열리고 익숙한 하녀가 한 명 들어온다. 하지만 일상에 있던 하녀는 아니었다. 대체로 식사를 비롯해 자신의 편의에 관련된 사항은 니나가 처리했기에 습관처럼 니나를 찾으려다, 최근에 결혼했지. 저택에 결혼할 남자까지 데려와 소개시켜 주었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적당히 재산이 있는 남자였던지라 니나가 알게모르게 내비쳤던 가족에 대한 걱정을 덜어서 다행이라고 생각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아쉬움이 가득한 기색으로 잔소리를 가득 남기고 간 뒷모습까지 되새기고 나서야, 안 먹냐? 핀잔같은 잔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눈앞에 차려진 식사에 시선을 둔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스프가 오목한 접시 안에 담겨있었고 옆에 연갈색으로 알맞게 구워진 먹음직스러운 빵이 바구니에 쌓여있었다. 그 앞에는 신선한 샐러드 위에 과일과 치즈를 풍부하게 올렸고 작은 그릇에는 샛노란 마멀레이드 잼이 담겨있었다. 식사라고 칭하기엔 부실했지만 주치의는 힐끔 보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너는 안 먹어?"

"누구랑은 달리 진작 먹고 누구가 일어나길 기다렸지."

한 마디를 안 져요. 투닥거림을 이어가는 대신 스푼을 들어 스프를 먼저 떠먹었다. 기숙학교에서 먹은 뒤늦게 물맛에 가까운 스프가 아니라 우유와 버터, 그리고 다른 재료를 아낌없이 써 각 재료의 맛이 알맞게 어우러진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따지자면 익숙함정도는 기숙학교에 잠깐 있던 몇 년이 아니라 졸업 후 제대로 집안을 물려받아 이어왔던 지금과 같은 식사가 익숙하였지만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분명 영어로 적혀있지만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종이뭉치를 넘기는 녀석이 있다보니 저절로 기숙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더 버티지 못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도 작은 불을 밝히고 무섭게 공부했지. 종이뭉치에서 겨우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저자에 적힌 사람의 직업과 이름정도였다. 라이오넬은 자신의 위대함에(그의 표현을 빌려서다.) 떠벌리기를 매우 좋아했는데 의학계에 자신의 이름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도 이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런 구석까지 처박힌 곳에 오는 신문에 이름이 실린 소식을 보았을 때도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듯 그게 그렇게 신기하냐고 핀잔까지 주었다. 사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잘은 모르지만 의사는 매우 많은 공부를 해야하는 직업이었고 해온, 해야 할 공부의 양에 따라오는 명예는 낮았으니까.

 

그런데도 고학년 때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직업을 얻어낸 것도 모자라 의학계에 이름까지 실리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지만 대단한 일이겠지. 분명 콧대를 잔뜩 세우고 자랑을 늘어놓아도 모자랄 성격이었다. 가끔 궁시렁대는 소리를 들어보면 진로를 바꾼 이유로 크게 틀어졌던 아버지와의 사이도 회복되려는 기미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직업인으로, 가족구성원으로 무엇 하나 빠지지않는 성과를 이루어냈는데도 자랑은 커녕 언급조차 하려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 갑작스럽게 진로를 바꾼 이유와 비슷할테지.

 

평생 변하지않는 존재는 시간밖에 없으리라. 매년 똑같은 순환을 반복하는 자연조차 지난 겨울과 올 겨울이 달랐다. 각자의 삶이 타고난 총량만 다를 뿐 시간은 그저 묵묵히 신분의 고저, 성별, 나이, 장소에 상관없이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흘러갔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속에서 생은 다양한 속도로 변해갔고, 그 중 내가 일구어낸 변화는 너무나 느려 변하지않는다고 착각할 정도로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그래도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워낙 느렸기에 많은 변화도 아니었다. 겹겹이 쌓여있는 베일 중 하나를 걷어냈을 뿐이었다.

 

베일을 걷고 마주한 사실을 보았을 때의 기분은 숨이 막힌다였던가. 전부 드러내지 않고 일부분만 들췄을 뿐인데도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 무게는 벅차 고개를 돌려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실은 또 다시 도망쳤다.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믿어왔던 진실을 깨뜨리기 싫어 나는 바보같게도 또 모르는 척 눈을 돌린다. 익숙하게 올라오는 자괴감이 원래도 미미한 식욕을 떨어뜨려 스푼을 내려놓았다.

 

"더 먹어."

"배 불러."

"가져왔을 때랑 차이가 보이긴 하냐?"

"더 안 들어가."

고개를 돌려버리자 라이오넬은 무어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한숨을 내쉬며 하녀를 부르는 줄을 잡아당겼다. 금세 식사를 가져다 주었던 하녀가 와 식기를 정리해 가져간다. 움직이는 손놀림이 어쩐지 기쁜 기색이 묻어나는 모양에 라이오넬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았지만 가만히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봉급이라던가, 대우라던가 집안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고 타 귀족과의 교류도 없다에 가까운지라 잘은 몰랐지만 그렇게 박하게 대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부족할테지. 니나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었고, 있는 집 자제가 모여 지내는 기숙학교에서 경험도 있던지라 그저 그러려니 두기로 하였다. 라이오넬은 이런 판단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최근들어 내게 반박과 쓴소리를 줄여갔기에 별로 말을 더하지 않았다.

 

"산책 갈래."

"별 일, 아니다. 가자."

겨울이 한창임을 증명하려는 날씨는 간밤에 눈을 소복히 내려두었다. 어린 날에도 들지 않았던 새하얀 눈을 꾹꾹 밟아보고 싶다는 묘한 충동이 일었다. 당연하다는 듯 두터운 코트를 비롯해 목도리, 장갑 등을 챙겨 꽁꽁 싸매는 주치의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터였다. 정원을 거쳐 적당히 관리하라고 말하고 신경을 끄고 사는 온실, 산책을 권하는 의사와 감기가 우려되는 의사가 내린 합의점이었다. 가자. 오랜 시간 움직임이 적었던 몸을 일으키자 익숙한 둔통이 일었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눈은 멈췄지만 날이 어두워 곳곳에 밝혀둔 등이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는 것처럼 가볍게 타올랐다.

 

* * *

 

"좋냐."

"응."

"애도 아니고, 나참."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눈을 밟는 일에 성공했다. 먼저 앞장서는 뒷모습을 보며 몰래 눈을 밟기 위해 발을 내딛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발을 살짝 든 채로 굳어서 서로 한참을 바라보다 한심함이 가득 담긴 한숨소리가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왜, 뭐. 왜. 그럴 수 있지. 괜히 찔린 사람처럼 불퉁히 쳐다보자 재차 한숨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만이야. 얕게 쌓였는데도 냉기가 올라와 몇 번 꾹, 꾹 밟아 의미 없는 모양을 만들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눈에서 시선을 떼었다. 온실은 멀지 않았기에 어쩐지 조금 빠르게 걸어가 열어준 문 안에 들어서자 훈훈한 온기가 그새 얼어버린 몸을 부드럽게 녹여주었다.

 

나오는 길에 하녀를 잡아 무어라 하더니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하인과 하녀가 들어서 테이블과 의자를 내려놓은 후 깨끗하게 닦은 후 테이블보를 깔고 그 위에 차를 우리기 위한 도구와 샌드위치, 쿠키, 푸딩 등을 비롯한 간식을 내려놓고 발소리를 죽여 나갔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어이없이 쳐다보았지만 정작 원흉은 무엇이 문제냐는 의사를 어깨를 으쓱이며 전달하며 차를 탈 준비를 한다. 능청스럽고 준비성 철저한 자식. 욕인지, 칭찬인지 발화자도 모를 말을 중얼이며 자리에 앉자 손이 빠르게도 차를 우려 향긋한 차 냄새가 녹음 냄새에 적절히 섞여 몸을 더욱 풀어주었다.

 

기숙학교에서 차를 배운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시키는 심부름. 악에 가까운 관습은 착취당한 저학년을 보상받고 싶은 심리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을 터였다. 차를 우리라는 명령과 비슷한 부탁을 들었을 때 멍청히 서있던 때도 있었다. 어떻게 배우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배우는 과정에서 얼마나 잔소리와 구박을 들었는지는 기억이 났다. 절로 떠오르는 목소리를 고개를 저어 쫓아낸다.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다.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유난히 기숙학교 시절이 자주 떠올랐다. 꿈 때문인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면서 절로 꿈에게 핑계를 돌린다. 하,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 정말 변함이 느리구나. 혼자 고개를 내젓고 한숨을 쉬어대는 내게 시선이 꽂혔다. 이어 모락모락 김을 피워내는 붉은 찻물이 담긴 하얀 잔이 내밀어졌다. 분명 고개를 들면 괴이한 사람을 보듯이 쳐다보고 있을테지. 일부러 고개를 돌리며 차를 머금자마자 익숙하지 않는 단맛이 입을 감쌌다. 라이오넬이 이런 실수를? 보지 않으리라 했던 다짐이 1분도 되지 않았다는 생각은 구석으로 밀어내고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자 평소와 다름 없는 표정이 기다리고 있다. 저 표정은 내가 뭘? 이라고 묻는 뻔뻔한 표정이었다. 분명 아까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설탕을 잔뜩 넣은게 분명했다. 테이블 위를 제대로 살피자 샌드위치에는 쨈과 크림이 듬뿍 발라져있었고, 쿠키는 초코칩이 아낌없이 박혀있었으며 푸딩은 안에 담긴 쨈이 흘러넘칠정도였다. 그나마 덜 달아보이는 스콘을 집어들어 씹었다.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영향력이 커진거지. 주인의 식성보다 주치의의 의견이 중요하다니. 서글프게 다시 잔을 기울인다.

 

"어제 서신 왔어. 유언장 공증 절차가 끝났다고."

"알아. 내게도 서신이 왔거든."

"덕분이야."

"이제야 내 능력을 알았냐? 언제나 깨닫는게 느리군."

"아, 취소. 취소."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라이오넬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막판에 갑자기 진로를 바꾸었지만 그간 쌓아온 지식을 무시할 수 없었고, 사회생활을 하며 겪은 경험을 통해 유언장에 증인이 필요하다는 사실만 알고 있던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 집안은 아주 파티를 하겠어. 비꼼이 가득한 어조였지만 어색히 웃으며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아주 단 음식만 준비하지 않았는지 쌉싸름한 단맛이 씹힌다. 부인도 없었고, 양자로 들인 자식도 없었으니 내가 죽으면 당연히 방계가문 중 가장 직계에 가까운 가문이 윌프레드의 성을 이을터였다. 그런데도 평소 교류 하나 없던 가문의 자식을 상속자로 지정한 이유는, 글쎄 알 수 없었다. 이름이 같으니 운명같지않냐고 어설프게 둘러댄 변명을 모를리 없었지만 라이오넬은 결국 유언장에 서명을 해주었고 공증까지 마쳐 법적 효력을 지니게 되었으니.

 

찻잔에 담긴 붉은 액체는 라이오넬의 뒤에 피어있는 붉은 꽃과 닮았다. 계절에 맞지 않는 알록달록하고 선명한 색은 외국에라도 온 기분이 들었다. 자주 오지 않았지만, 올 때마다 유지하고 있기를 잘 했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하며 찻잔을 마셨다. 쌉싸름하게 남은 맛을 폭 덮어주는 단맛이 감돌았다. 쓴맛과 단맛. 금세 물려 잔을 내려두자 그럴 줄 알았다는 콧김소리와 맹물이 따라졌다. 저럴거면서 말이지.

 

유언장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물을 마신 잔을 내려놓는 소리까지 울리자 간간히 울리는 바람 소리 외에는 고요한 침묵이 자리잡았다. 원래 이렇게 말이 없었던가? 원래 우리는 이렇게 침묵했던가. 어쩐지 어색하면서도 익숙했다. 방금까지 핀잔과 반박이 주를 이루었지만 분명히 나눈 대화가 꿈처럼 아득했다. 그래, 꿈. 아침부터 꿈은 내용조차 흐릿했지만 자꾸만 발목에 감겨들었다. 꿈이 말을 걸리도 없었지만 마치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애원같아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라이오넬."

"응?"

"꿈을 꾸었어."

"무슨 꿈을 꿨는데?"

내가 무슨 꿈을 꾸었냐면.

 

말문이 막혔다. 무슨 꿈을 꾸었더라. 분명히 꿈을 꾸었다. 꿈과 실제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사실을 알면서도 며칠은 잠들었어야 꿀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아주 긴 꿈을 꾸었다. 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던 것 같았다. 각색된 연극처럼 진행과 연기하는 배우만 다를 뿐 엔딩은 같은 꿈을 꾼 것도 같았는데.

 

"이집트 왕이 되어 하렘 제국을 건설하여 옆구리에 미녀를 잔뜩 거느리고 있는 꿈이라도 꿨냐?"

아.

 

분명 장난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고, 놀림마저 섞인 어조였다. 나는 이에 그건 너나 꿀 꿈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게 현실이  맞으니 어서 꿈에서 깨게 해달라고 대답하거나. 그래야 맞다. 아니, 그래야 맞는 것이 아니라 그랬던가? …이런 상황이 있었나? 알버트, 알버트?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여전히 꿈 내용은 얇은 베일로 겹겹이 덮어둔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분명. 꿈에서 분명.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

"…라이오넬."

"사람이 부르면! 후, 대답을 하라고…."

라이오넬이 드물게 놀란 표정이었다가 안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땀이라도 흘렸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급격하게 속이라도 타는지 찻물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건수를 잡았다는 생각을 대신하여 말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내가 죽는 꿈."

"…뭐?"

"내가 죽는 꿈을 꿨어."

"……."

그래. 한 꺼풀 벗겨낸 꿈의 내용은 내가 죽는 것이었다. 분명 아주 사무치고, 많은 감정을 느꼈던 것도 같았지만 그것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법 많은 꿈을 반복할 동안 나는 죽었다. 총을 맞아 죽기도 하였고, 계단에서 떨어져 죽기도 하였으며,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어딘가에 갇혀 얼어죽기도 하였다. 꿈이었지만 새삼 죽음을 맞이할 때의 공포가 떠올라 손이 저절로 떨렸다.

 

"…오래 살거야."

"라이오넬?"

"오래 살거라고. 알버트. 너는, 오래 살거야."

"……."

이번에는 침묵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또다시 익숙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너의 표정은 어딘가 괴롭고, 서글퍼보여 보기가 어려워 시선을 피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이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바랐지만 이제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안다. 의사는 아니었지만 심장은 과거보다 더욱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다고 감이 왔고, 이 사실은 누구보다 눈앞의 사람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오래 살거야. 서로 입을 연 사람은 없었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울렸다. 라이오넬.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 한 이름이 맴돌다 힘을 잃고 스러졌다. 꿈을 꾸고, 반복했을 때의 내용은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너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죽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의도와 무의식을 반씩 섞어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두터운 옷을 입었고, 감각을 느끼기엔 메마른 손은 가냘프게 뛰는 심장박동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 했다.

 

"알버트. 나는, 나는 네가."

라이오넬은 라이오넬 이스터브룩답지 않게 말을 잇지 못 하고 다물었다. 왜인지 이어질 뒷 말을 알 것 같았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오랜 시간 너를 보아온 탓일까, 차마 뱉어내지 못 한 말이 예상이 갔다. 그 말이 이 생에서 한 번도 내게 하지 않았던 말이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로썬 도무지 대답해줄 수 없는 바람이자, 부탁이었고, 애원이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또 다시 어리석게도, 외면하였다.

 

시선을 조금 들자 잔상처럼 잘게 떨리는 어깨와 너머로 해가 짧은 탓에 벌써 어둑해지는 하늘이 보였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라이오넬. 돌아가자. 조금 특별한 일이 있었지만. 오늘은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다.

​온새 (@alll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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